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다움’ 오해와 진술 신빙성 판단 기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다움’ 오해와 진술 신빙성 판단 기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다움' 오해와 진술 신빙성 판단 기준

 

법정에서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성폭력 사건. 그리고 재판부가 던진 질문들. “왜 즉시 신고하지 않았나요?”, “왜 그 후에도 가해자와 연락을 주고받았나요?”,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나요?” 이런 질문들의 이면에는 ‘진짜 피해자라면 이렇게 행동했어야 한다’는 선입견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2019도4047 강제추행 사건은 이러한 ‘피해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에 일침을 가하는 중요한 판례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배경: 연인 사이에서 발생한 강제추행

한 커플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연인 관계였던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에서 성관계 과정 중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접촉이 있었고, 이것이 강제추행 혐의로 이어졌습니다. 피고인은 시종일관 “서로 합의한 관계였다”며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피해자는 명백히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강제로 성적 접촉이 이루어졌다고 진술했죠.

 

1심에서는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을 인정해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법원은 피해자가 ‘피해자답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사건 이후 피해자가 즉시 신고하지 않고, 피고인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점이 의심의 근거가 된 것이죠.

 

이에 검찰이 상고했고,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뒤집는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습니다. 도대체 대법원은 어떤 근거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법정에서 부딪힌 두 가지 시각

피고인 측의 주장: “합의된 관계였다”

피고인 측은 일관되게 ‘연인 관계에서의 자연스러운 성관계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연인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그 화해 과정에서 이루어진 성적 접촉이었으며, 어떠한 폭행이나 협박도 없었다는 것이죠. 피해자가 사건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취했다는 점을 들어 피해자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피해자 측의 주장: “명백한 거부 의사가 있었다”

반면 피해자는 당시 명확하게 거부 의사를 표현했음에도 피고인이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성적 접촉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건 이후 즉각적인 신고나 관계 단절이 없었던 것은 연인 관계라는 복잡한 감정과 상황, 그리고 심리적 혼란 때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직접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이었습니다. 과연 법원은 어떤 기준으로 이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해야 할까요?

 

‘피해자다움’이라는 허상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피해자다운 반응’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진짜 피해자라면 당연히 즉시 저항하고, 소리 지르고, 사건 직후 바로 신고하며, 가해자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죠.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요? 성폭력 피해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일부는 충격과 공포로 인해 저항하지 못하거나 ‘얼어붙음(freezing)’ 현상을 경험합니다. 또 일부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사건을 부정하거나 일상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하기도 합니다. 특히 연인이나 지인 관계에서 발생한 성폭력의 경우, 관계의 복잡성 때문에 즉각적인 단절이나 신고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항소심 법원은 이러한 성폭력 피해의 특수성을 간과했습니다. 피해자가 ‘피해자답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한 것이죠. 이런 관점은 성인지감수성이 결여된 판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법원의 판단: 성인지감수성을 갖춘 진술 평가

대법원은 명확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은 ‘피해자다운 반응’의 유무가 아니라, 진술 내용의 구체성, 일관성, 객관적 정황과의 부합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판단 근거들

  • 피해자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적이었으며, 객관적 정황과 모순되지 않았다는 점
  • 피고인의 주장이 경험칙상 합리성이 결여되고 모순적이었다는 점
  •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피해자의 심리적 부담과 사회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

 

대법원은 특히 “피해자다운 반응”이라는 고정관념에 근거한 판단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개인적 성향, 피해 정도, 가해자와의 관계, 주변 환경 등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으며,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판결이 주는 법적 의미

진술 신빙성 평가의 새로운 기준

이 판결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할 때 적용해야 할 구체적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단순히 피해자의 행동이 ‘전형적’인지 여부가 아니라, 진술 자체의 구체성과 일관성, 그리고 객관적 정황과의 정합성을 중심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죠.

 

또한 피고인의 주장이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될 경우, 이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간접정황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법리로 제시되었습니다.

 

성인지감수성의 법적 의미 강화

이 판결은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개념을 단순한 구호가 아닌 구체적인 법적 판단 기준으로 정립했습니다.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법원은 성별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피해자의 특수한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만약 친구나 가족이 성폭력 피해를 겪고 즉시 신고하지 않거나, 가해자와 연락을 유지했다면, 그 진술을 의심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할까요?

 

실제 사례에서 배우는 교훈

이 판례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연인 관계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흔히 ‘데이트 성폭력’이라고 불리며, 증거 수집이나 신고가 특히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연인 사이라도 모든 성적 접촉은 상호 동의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을 이 판례는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연인 사이니까’, ‘이전에 합의된 관계가 있었으니까’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거부 의사를 무시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또한 피해자가 즉각적으로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성폭력 피해 주장의 신빙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중요한 교훈입니다. 특히 친밀한 관계에서는 복잡한 감정과 의존성으로 인해 즉각적인 단절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 진술 평가를 위한 실질적 가이드라인

이 판례를 통해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을 평가할 때 고려해야 할 실질적인 가이드라인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피해자가 피해 상황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진술하는지는 중요한 평가 요소입니다. 다만, 외상 경험이 기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사소한 불일치는 신빙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객관적 정황과의 부합성

피해자의 진술이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다른 증거나 정황과 일치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통화 기록, 메시지, 목격자 진술 등 간접 증거와의 일치 여부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피고인 주장의 합리성 검토

피고인의 해명이 경험칙에 비추어 합리적인지, 내적 모순은 없는지도 중요한 고려 요소입니다. 피고인의 주장이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될 경우, 이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성폭력의 특수성 고려

성폭력 피해 후 피해자가 보이는 다양한 반응(지연 신고, 가해자와의 접촉 지속 등)은 심리적 방어기제나 복잡한 감정의 결과일 수 있으므로, 이를 진술 신빙성 평가에서 부정적 요소로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판결 이후의 변화

이 대법원 판결 이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법원의 태도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진술 자체의 신빙성을 더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수사기관과 법조계에서 성인지감수성 교육이 확대되고,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피해자 보호 조치가 강화되는 등 긍정적인 변화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고,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이 ‘왜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판례는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사법부의 시각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핵심 시사점

2019도4047 강제추행 사건 판결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할 때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의 판례를 넘어,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법적 판단 기준의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피해자를 ‘의심’의 대상이 아닌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 그리고 성폭력의 특수성을 고려한 증거 평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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