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항상 공포에 질려 있어야 하고, 가해자를 피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생각 말이죠. 하지만 현실에서 피해자의 행동은 이런 고정관념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대법원 2020도8016 판결은 바로 이러한 ‘피해자다움’의 고정관념을 깨고, 아동 성폭력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 사례입니다.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
2018년 1월, 한 14세 아동의 평범했던 일상이 무너졌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주거지에서 이 아동을 강간했고,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음날 사과를 받기 위해 찾아온 피해 아동을 다시 강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피고인은 첫날 있었던 일은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고 주장했으며, 다음날에는 아예 피해자를 만난 적조차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피해자다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피고인 측은 “피해자가 전날 강간을 당했다면, 왜 다음날 다시 피고인의 집을 찾아갔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는 많은 성폭력 사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어 논리입니다. 피해자의 행동이 일반적인 ‘피해자다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것이죠.
법원의 판단 기준은 무엇이었나?
‘피해자다움’의 고정관념을 깨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피해자가 전날 강간을 당한 후 그 다음날 스스로 피고인의 집에 찾아갔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행동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사정이 되지는 못한다”고 명확히 선을 그은 것입니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 특히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심리와 행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변화를 의미합니다. 피해자는 공포, 혼란, 자책감 등 복잡한 감정 속에서 때로는 일반적인 예상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14세 아동의 경우, 성인과 달리 상황을 판단하고 대응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어, 피해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가해자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에 다시 접촉을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단순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행동이 피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입니다.
진술의 일관성과 구체성을 주목하다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일부 언행’이 아닌 ‘진술 전체’를 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피해자의 진술이 얼마나 일관되고 구체적인지, 객관적 증거와 부합하는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원심은 피해자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성 있게 이루어졌으며, 객관적인 정황과도 부합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이러한 원심의 판단을 정당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진술의 신빙성은 단순히 피해자의 행동이 ‘일반적인 피해자처럼’ 보이는지가 아니라, 그 진술 자체의 품질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이 판례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아동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
아동 피해자의 심리적 특성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는 성인과는 다른 심리적 특성을 보입니다. 이들은 종종:
-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 가해자에 대한 감정이 양가적일 수 있습니다(특히 아는 관계인 경우)
- 죄책감이나 자기 비난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 대처 메커니즘이 성인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신뢰하는 성인의 지시나 유도에 취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동 피해자에게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공정한 판단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이런 아동 피해자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존중한 판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술 증거의 중요성
성폭력 사건, 특히 아동 대상 성폭력 사건에서는 물리적 증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하거나 주된 증거가 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따라서 진술의 신빙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재판의 핵심 쟁점이 됩니다.
이 판례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할 때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보다 진술 자체의 일관성, 구체성, 객관적 정황과의 부합성 등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줄이고, 보다 객관적인 사실 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 있는 진전입니다.
판결의 의의와 시사점
이 대법원 판결은 단순히 한 건의 사건을 넘어 우리 사회와 법체계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을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또한 이 판결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의 취지를 충실히 반영한 판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법은 아동과 청소년을 성적 학대로부터 특별히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법원이 아동 피해자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판단 기준을 적용한 것은 이 법의 정신에 부합합니다.
앞으로 유사한 사건들에서 ‘피해자다움’을 기준으로 진술의 신빙성을 평가하려는 시도는 이 판례를 통해 견제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 특히 아동 피해자의 권리 보호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이 판결은 아동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피해자의 외형적 행동이나 고정관념적인 ‘피해자다움’보다는 진술 자체의 품질과 일관성, 그리고 객관적 증거와의 부합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함을 분명히 한 중요한 판례입니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전환과 법적 보호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